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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자화학과 그래픽 디자인 사이: 월쉬 도표와 Peoplemovin

‘보는 것이 믿는 것이다’라는 익숙한 문구에서 짐작할 수 있듯, 한 대상을 이해하고 신뢰하는 것은 그것을 보는 것부터 출발합니다. 원자와 분자 같이 눈으로 볼 수 없는 대상과 씨름하는 물리학자와 화학자는 자신의 연구 대상을 눈에 보이는 형태로 표현하는 것을 즐깁니다. 머릿속에서 막연하게 생각하는 것보다, 눈에 보이는 실체를 놓고 고민하는 것이 논리를 전개하는 데 훨씬 도움이 되기 때문입니다. 이들은 과학 개념이나 데이터를 시각화하는데 익숙합니다. 그래픽 요소가 간단하면 간단할수록 시각화 과정에서 오류가 적고, 정밀한 논리 오류를 피할 수 있기에 특히 점과 선만으로 구성한 시각화를 선호합니다.

오늘 소개할 월쉬 도표(Walsh correlation diagrams)도 그 대표적인 예 중 하나입니다. 분자의 구조를 명확히 아는 것은 모든 화학자의 본능적 목표입니다. 화학 반응이라는 드라마에서, 주인공인 분자들이 벌이는 상호 작용을 규명하고 예측하는 것이 바로 화학이란 학문입니다. 우리가 드라마의 내용을 잘 이해하려면 극 중 인물의 특징을 잘 알아야 하듯, 화학 반응을 잘 이해하기 위해서는 주인공인 분자의 특성을 명확하게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분자의 특징은 보통 그 분자의 구조 특성에서 대부분 결정됩니다. 따라서 세상 모든 분자의 구조를 속 시원히 알아내는 건 모든 화학자의 가장 기본적인 욕망입니다.

영국의 화학자 아서 D. 월쉬(Arthur Donald Walsh)가 1953년 처음 소개한 월쉬 도표는 화학자의 이런 욕망을 실현하려는 고안 물 중 하나입니다. 분자 구조는 그 구성 원자 간 결합 구조에 의해 결정됩니다. 분자의 기하학적 결합 구조(molecular geometry)는 구성 원자 간 결합 길이와 각도로 설명할 수 있습니다. 분자를 구성하는 원자가 서로 어느 정도 거리와 각도로 결합하고 있느냐에 따라 기하학적 분자 구조가 결정됩니다. 월쉬 도표는 세 개의 원자로 구성된 분자(삼원자 분자, triatomic molecule)의 결합각도를 예측하는 도표입니다.

모든 분자는 가장 안정한 에너지 상태에서 고유의 결합각도를 형성합니다. 따라서 분자를 구성하는 원자가 서로 결합했을 때 가장 안정한 에너지 상태가 무엇인지 안다면, 그 분자 고유의 결합각도를 예측할 수 있습니다. 분자의 에너지 상태는 양자역학 개념을 기초로 한 분자 궤도함수(molecular orbital, MO)로 기술합니다. 월쉬 도표는 이 분자 궤도함수와 결합각도 사이의 관계를 시각화해서 한 눈에 볼 수 있게 합니다.

The Walsh correlation diagram for a XY2 molecule

위 그림은 하나의 X 원자와 두 개의 Y 원자가 결합해 형성한 분자(XY2)의 월쉬 도표입니다. Y-X-Y 형태로 결합 구조를 이룬 분자가 만들어낼 수 있는 기하학적 구조는 원자들의 결합각도에 의해 결정되고 그 범위는 90도에서 180도까지입니다. 월쉬 도표를 만들려면 먼저 결합각도가 90도일 때 분자 궤도함수 에너지 준위를 왼쪽에, 180도일 때 분자 궤도함수 에너지 준위를 오른쪽에 배치합니다. 그런 뒤 결합각도 90도와 180도 사이의 모든 분자 궤도함수 에너지 준위를 계산하여 연속된 선 형태로 그려줍니다. CO2, NO2, SF2 등과 같은 삼원자 분자에 대한 분자 궤도함수 에너지 준위 정보를 안다면, 이 월쉬도표를 통해 해당 분자가 어떤 결합각도를 갖는지 직관적으로 예측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월쉬 도표의 구조적 특징은 다른 데이터 시각화에서도 얼마든지 이용할 수 있습니다. 월쉬 도표의 형태를 일반화하면 다음과 같은 요소로 구성되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Walsh diagram (general)

왼쪽 축은 상태 1을 나타냅니다. 축 위에는 상태 1일 때 각 변수(A, B, C, …)가 갖는 값대로 배치되어 있습니다. 오른쪽 축은 상태 2를 나타냅니다. 축 위에는 상태 2일 때 각 변수(a, b, c, …)가 지닌 값대로 배치되어 있습니다. 도표의 곡선은 상태 1에서 상태 2로 진행할 때(혹은 그 반대일 때), 각 변수가 갖는 값의 변화를 표현합니다. 여기서 각 변수 값은 정량 데이터(에너지, 비용, 소비량 등)일 수도 있고, 수치화 할 수 없는 범주형 데이터(국가명, 회사명, 인명 등)일 수도 있습니다. 어떤 것이든 표현하고자 하는 논리에 합당한 형태로 배치해 주면 됩니다.

월쉬 도표와 비슷한 구성의 데이터 시각화 사례를 찾다가, 세계 각국의 이민 인구 데이터를 시각화한 사례를 발견했습니다. 디자인 전문회사 frog의 선임 디자인 테크놀로지스트(deisgn technologist) Carlo Zapponi가 제작한 ‘peoplemovin‘이란 데이터 시각화 작품입니다. Peoplemovin은 아름다운 곡선으로 세계 각국의 이민 인구 흐름을 보여줍니다(인터랙티브 작품이니 해당 사이트 직접 방문을 권해 드립니다).

Peoplemovin

(출처: peoplemov.in)

기본적인 구조는 앞서 설명한 월쉬 도표의 일반적인 구조와 같습니다. 왼쪽 축에 이민 출발 국을, 오른쪽 축에 이민 대상국을 표시했고, 축에 각각 나라 이름을 배치했습니다. 배치 기준은 알파벳 순입니다. 그런 뒤, 출발 국과 대상국을 곡선으로 이었습니다. 축과 축을 이어주는 곡선은 두 나라의 이민 인구 흐름이 강한 경우 더 두껍게 표시했습니다. 월쉬 도표에서 분자 궤도함수의 에너지 준위를 알면 직관적으로 분자 결합각도를 예측할 수 있었듯이, peoplemovin에서는 각 나라를 선택할 때 마다 이민 인구의 분포가 어떤지 직관적으로 알 수 있게 해 줍니다. 단, 월쉬 도표에서 축간거리가 특정 값(결합각도)의 정량적 변화를 의미하는 것에 비해, peoplemovin에서는 축간거리 자체가 가리키는 값이 없다는 점은 두 시각화의 차이입니다.

화학자가 양자역학 개념을 이용해 분자 구조를 예측하기 위해 만든 월쉬 도표, 디자이너가 세계 이민 인구 흐름을 표현하기 위해 만든 peoplemovi ― 서로 다른 영역, 서로 다른 데이터를 설명하기 위해 시각화한 것이지만 이렇게 놀라운 유사성이 숨어 있습니다. 양자화학과 그래픽 디자인, 과학과 예술은 생각보다 멀리 떨어져 있지 않습니다. ▩


* 본문에 사용한 월쉬 도표는 아래의 책을 참고, 수정·보완 해 그렸습니다.

Wolfgang Demtröder, Atoms, Molecules and Photons: An Introduction to Atomic-, Molecular- and Quantum Physics, 2nd Ed, Springer, 2011.

* 아래 그래프는 세포(S. cerevisiae) 내 23가지 단백질의 산소 퓨가시티(fugacity)에 따른 활성도 데이터를 시각화한 것입니다. 본문에 소개한 peoplemovin을 보며 비슷한 느낌이 들어 소개해 봅니다. 복잡한 과학 데이터이지만, 이렇게 시각화해 놓고 보면 과학 데이터가 줄 수 있는 고유의 조형미가 보이기도 합니다. 그래프는 R을 이용해 그렸으며, CHNOSZ(Chemical Thermodynamics and Activity Diagrams) 패키지에 포함된 데이터와 예제 코드를 참조했습니다.

CHNOSZ graph by R

One Comment

  1. wrote:

    감사합니다

    2014/04/06 Sun at 1:09 pm | Permalink

One Trackback/Pingback

  1. […] 도표(Walsh correlation diagrams)가 예상 외로 높은 비율을 차지하고 있습니다. 일전에 올린 글이 검색 엔진에서 검색된 결과인데, 그 글에는 월쉬 도표에 관한 개괄적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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