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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이밍 도구로서 숫자 – (2) 그래프

오늘은 국내에서 업계 2위를 차지하며 1위 업체를 맹추격하는 커피전문 체인점 B사의 작년 매출 실적을 발표하는 날입니다. 회의실에 모여 있는 임원들 앞에 경영전략팀장이 발표하고 있습니다.

이 그래프를 보시는 바와 같이, 우리 B사는 작년 한 해 동안 경쟁사인 S사와 큰 차이 없는 매출을 거두었습니다. 이런 경향이 계속된다면 올해 말, 업계 1위 달성에 큰 무리가 없을 것으로 보입니다.

회의실에 모여 있던 사람들의 박수가 터져 나옵니다. 발표를 맡은 경영전략팀장은 사장의 얼굴에 환한 웃음이 번져 있는 것을 확인하고 곧 인상될 연봉을 상상해 봅니다.

같은 시각, 경쟁사이자 업계 1위 업체인 S사에서도 같은 주제로 회의가 열리고 있습니다. 역시 임원들 앞에서 S사의 경영전략팀장이 발표합니다.

이 그래프를 보시는 바와 같이, 작년 한 해 경쟁사인 B사가 맹추격했지만, 여전히 우리 S사의 매출이 앞선 것으로 조사되었습니다. 이번에 우리 S사가 마련한 새로운 전략이 제대로 실행된다면 올해 말엔 이 격차를 더욱 늘릴 수 있을 것으로 판단됩니다.

회의실에 모여 있던 사람들의 입에서 안도의 한숨이 조용히 흘러나옵니다. 작년 한 해, B사가 저가 공세와 공격적인 점포 늘리기 전략으로 S사의 입지를 흔들 것 같이 보였지만, 여전히 S사가 업계 1위를 고수하는 데는 문제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발표를 한 경영전략팀장이 사장의 얼굴을 재빨리 살펴봅니다. 만족스러운 표정이 스쳐가는 것을 확인했으니, 올해의 연봉 인상은 문제가 없으리라 확신합니다.

위의 사례는 물론 허구입니다. B사와 S사는 각각 서로 만족스러운 상태에서 회의를 마칩니다. 그런데 재밌게도 B사와 S사가 이용한 그래프는 모두 같은 정량 정보를 담고 있습니다. 즉, 같은 정보를 가지고 두 회사의 발표자는 서로 다른 주장을 한 것입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할까요? 해답은 데이터를 표현하는 방법, 즉 그래프의 작성 방법이 달랐기 때문입니다. 두 회사에서 사용한 그래프의 막대는 길이, 넓이, 색이 모두 같습니다. 한 가지 차이가 있다면, S사가 사용한 그래프의 막대에 공간이 삽입되는 테두리가 추가되었다는 점입니다. 이 테두리의 역할은 굉장합니다. 이 테두리 하나로 인해, B사와 S사의 매출 실적의 차이가 뚜렷하게 보이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결과가 나타나는 이유는 우리가 중학교 생물 시간에 배웠던 베버의 법칙(Weber’s Law, 정확히는 Weber-Fechner’s Law)으로 설명할 수 있습니다. 베버의 법칙은 우리가 자극의 차이를 느끼는 방법을 설명해 줍니다. 우리의 뇌는 자극의 세기에 따라 자극의 차이에 대한 민감도가 달라집니다. 같은 자극의 차이라도 자극의 세기가 약한 구간에서는 그 차이를 인식할 수 있지만, 자극의 세기가 강한 구간으로 갈수록 차이를 인식하기 어렵습니다.

a와 b는 자극의 세기 차이 값이고 그 양은 같습니다. 그러나 각각의 자극 변화에 해당하는 지각의 정도 차이는 서로 다릅니다. 즉, 같은 자극 세기 변화량이지만(a=b), 지각 정도의 차이는 c가 d보다 큰 값을 가집니다(c>d). 같은 자극 세기의 차이지만, a는 b에 비해 낮은 자극 구간에 있었기 때문에, 지각의 차이도 훨씬 더 크게 느낄 수 있는 것입니다.

앞서 예를 든 그래프에 적용하면, b에 해당하는 경우가 B사가 사용한 그래프이고, a에 해당하는 경우가 S사가 사용한 그래프입니다. 똑같은 길이의 그래프 막대지만, 테두리를 추가한 S사의 그래프는 테두리 때문에 생긴 공간이 일종의 새로운 자극으로 작용하면서 두 막대 길이의 상대적 차이를 더 분명하게 느끼게 해 준 것입니다. 즉,  같은 자극 차이지만, 검은색 막대 차이(b)보다 흰색 막대 차이(a)가 우리 눈에 더 큰 길이 차이를 느끼게 해 주는 신호로 작용한 것입니다. (실제로 검은 막대간의 길이 차이와 흰색 막대간와의 길이 차이는 동일합니다.)

지금까지 살펴본 바와 같이, 같은 값을 지닌 데이터라도 그것을 그래프로 어떻게 시각화했느냐에 따라 서로 다른 해석과 주장을 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누군가가 그래프를 가지고 어떤 주장을 한다면, 보여주는 그래프를 날카롭게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래프 역시 이전에 살펴봤던 통계와 같이 강력한 프레이밍 도구로 충분히 사용될 수 있으니 말입니다. ▩

 


[참고]

1. 본문에서 사용한 막대그래프 사례는 다음 논문에서 인용한 것입니다. 이 논문은 데이터 시각화 분야에서 아주 기초적인 부분을 익힐 수 있도록 도와주는 중요한 논문입니다. 여러 번 읽어서 완전한 내 것으로 만드시길 권해 드립니다.

  • William S. Cleveland and Robert McGill, J. Am. Stat. Assoc. 1984, 79, 531-554. [PDF]

2. 본문의 막대그래프에는 또 하나의 트릭이 적용되어 있습니다. 막대그래프를 일부러 같은 선상에 정렬하지 않았습니다. 이것은 크기 비교를 어렵게 하는 대표적 방법입니다.  같은 선상에 정렬하면 이전보단 훨씬 비교하기 수월하지만, 이 경우도 역시 테두리를 적용한 오른쪽 그래프가 그 차이를 빠르게 파악할 수 있다는 점은 변하지 않습니다.

3. 본문에 사용한 베버의 법칙 그래프는 아래의 책을 참고해서 그렸습니다.

 

One Trackback/Pingback

  1. […] This post was mentioned on Twitter by 릴라 and 서울 사는 김서방, akaiving. akaiving said: 하나의 그래프를 가지고 서로 다른 두 주장을 할 수 있을까요? 가능합니다. 그 예와 이유를 설명해 보았습니다. 데이터 시각화에 관련된 중요 논문도 언급되어 있습니다. http://goo.gl/3OinI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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